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키포로스 2세 (문단 편집) === 최후 === 니키포로스가 인기를 잃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황후 [[테오파노(10세기)|테오파노]]는 황제의 부하이자 외조카이며 빼어난 미남이었던 [[요안니스 1세|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니키포로스는 황후가 조카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만 요안니스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해 965년 말에 군대 사령관직을 박탈하고 아나톨리아의 자기 영지로 돌려보냈다. 이에 테오파노 황후는 남편에게 요안니스에 대한 처벌이 과하다고 설득했고 니키포로스는 이에 흔들려서 요안니스를 불려들었지만 대신 칼케돈에 있는 그의 집에만 머물고 콘스탄티노플에 올 때는 별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후 요안니스는 한밤 중에 해협을 건너 황궁의 외딴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 테오파노 황후와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후 두 사람은 니키포로스를 죽이자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지난날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하다가 황명에 불순종했다는 이유로 해임당한 미카일 부르체스도 포함되었다. 그 후 음모가들은 여자로 변장하고 옷 안에 칼을 숨긴 채 황후를 만나러 온 척하면서 황궁의 규방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그들을 여러 작은 방에 분산시키고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참고로 부르체스의 황명 불순종이란 다음과 같다.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https://www.youtube.com/watch?v=WSI2Ketsnxw|Byzantine Reconquista - Cilicia and Aleppo 961-962]]'에 의하면, 안티오키아가 옛 총대주교좌로 워낙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직접 공성하여 도시를 훼손시켜 가면서 점령하기보다는 주변에 구원군과 식량 보급을 막는 요새를 깔고서 천천히 말려죽이려는 것이 니키포로스의 의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장군으로서 정복활동으로 인기를 얻어 [[역성혁명|황통을 갈아치우지는]] 않으면서도 어린 황제(바실리오스 2세)의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어린 황제를 제끼고서 본인이 선임 황제로 올라선 니키포로스의 모델은 다른 장군들에게도 욕심나는 롤모델로 다가왔고, 안티오키아는 콘스탄티노플과 거리가 제법 멀어서 황제 및 중앙정부가 바로바로 군의 움직임을 컨트롤하기가 어려워 결국 현지 사령관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 부르체스는 황명을 정면으로 어기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공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찌어찌하여 안티오키아를 공략하여 점령했다. 969년 12월 11일, 날씨가 몹시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며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었다. 음모가들은 황궁을 떠나 보스포루스를 건너 황제가 있는 요새로 가려 했지만 폭풍이 워낙 거세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요안니스는 친구 세 명과 함께 칼케돈에서 배를 타고 죽을 고생을 하며 해협을 건너 밤 11시에 요새 바로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황후 처소의 창문에서 밧줄 하나가 소리없이 내려오자, 음모자들은 한 명씩 차례로 밧줄을 타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사전에 내통하여 대기하고 있던 환관 한 명이 황제의 침실로 안내했다. 음모가들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바닥에서 표범 가죽을 깔고 자고 있던 니키포로스는 인기척에 잠을 깨고 일어났다. 그 순간 레온 발란테스라는 자가 달려들어 그를 칼로 찔렀다. 이 칼은 니키포로스의 얼굴을 스쳤고 황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명을 지르고 큰 소리로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며 침대 발치로 기어갔다. 그러나 요안니스 치미스키스는 그를 침대 바깥으로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 다음 음모가들은 황제의 부정과 배은망덕을 비난하고는 그의 몸을 무자비하게 걷어차면서 머리털과 수염을 잡아뜯었다. 이윽고 한 사람이 황제의 턱을 부수었고 다른 사람은 칼집으로 그의 앞니를 후려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고 굽은 칼이 황제의 목숨을 끊었다. 그 후 자객들은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비병들한테 그들의 정체를 밝히며 권력으로 위협하자 경비병들이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니키포로스의 머리를 잘라 시신을 창문 아래에 내던졌다. 이리하여 크레타 탈환의 영웅이자 사라센인의 저승사자였던 니키포로스는 아내와 외조카의 배신으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위에서 나온 사이프 알-다울라가 967년에 죽고 나서 [[함단 왕조]]가 자중지란에 빠졌던 기회를 포착한 페트로스는, 니키포로스가 최후를 맞았던 때와 거의 비슷한 시간대였던 969년 12월에서 970년 1월 사이, 아마도 중앙으로부터의 지시가 없이[* 이 니키포로스의 죽음으로 혼란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수도 [[알레포]]로 접근해서 [[막타]]를 쳤다.(...) 그리고 나서 함단 왕조를 속국으로 삼는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Safar|사파르 조약]]을 맺었다. 아미르 지명 권한, 연공 바치기, 동로마로부터의 수입품에 10% 관세를 매기고 그것을 집행 및 감독하기 위한 관원 파견, 다른 이슬람 군대가 함단 왕조의 영토를 넘나드는 것을 금지, 시리아 지역에서의 동로마군대의 활동을 지원할 것, 함단 왕조 내 기독교인 지위 인정, 동로마 출신 탈주자 및 다른 이슬람 세력의 스파이 송환 등 조약 내용은 상당히 빡빡했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Treaty_of_Safar|Treaty of Safar]] 중, 'The Byzantine emperor would recognize Qarquya as the rightful emir, and his lieutenant Bakjur as his heir. Subsequently, however, the emperor would name both the emir and the qadi from the city's inhabitants. In return, however, '''Aleppo and its territory became tributary to Byzantium''' to the order of '''700,000 silver dirhams annually''', or a head tax of one gold dinar (equivalent to 16 dirham). Furthermore, '''an imperial official was installed in the city to collect a 10% tax on all goods imported from Byzantine territory''', and the emirs of Aleppo were '''forced to prohibit armies from other Muslim states to pass through their territory, provide intelligence on any such armies moving against Byzantium, and render military assistance to any Byzantine army operating in Syria.''' '''The legal standing of Christians in Aleppine territory was guaranteed''', and '''any slave or robber who fled from Byzantine territory had to be returned''', along with any '''Muslim spy who came to gather intelligence on the Byzantine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